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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장식- 궁궐의 비언어적 소통법


 



 

제목- 궁궐장식- 조선왕조의 이상과 위엄을 상징하다

저자- 허균

출판사- 돌베개


 

작년 6월부터 9월까지 궁궐을 돌아다니며 조선왕실과 궁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래서 같은 출판사의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를 읽고 나서 조선의 왕이 어떤 존재인지는 간단하게라도 알게 됐다. 하지만 유교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와 궁궐 자체에 대한 글은 아직 읽지 못하였는데 책을 찾던 도중 이러한 책이 있어서 읽게 되었다.


 

우라는 여러 사람들과 대화한다. 그러면서 여러 비언어적 표현도 같이 활용한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다. 실제 의미 전달에서 중요한건 비언어적 표현이다. 조사결과 의미전달에 있어서 대화는 의미전달에 있어 7%의 비중밖에 되지 않는단 것이다(새로운 연구결과가 있음 피드백 바란다.)


 

우린 건물과 대화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린 건물을 보며 그것이 세워진 곳, 건물의 형태, 건물의 색 등으로 저 건물이 어떤가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저 건물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하고 있는 이미지, 즉 디테일은 놓치게 되어버린다.


 

계단을 보지만 계단의 장식엔 신경을 못쓰게 되며, 지붕을 볼 뿐 처마와 용마루의 디테일은 놓치며, 단 위에 있는 건물을 보지만 단 위의 솥엔 신경을 안쓰며, 어좌를 보지만 어좌의 장식물을 자세히 보지 않으며, 담장을 보지만 그 문양에는 의미가 있겠거니 하고 넘긴다.


 

이 책을 보며 알게 된 것은 궁궐의 세워진 곳, 세워진 건물 자체, 현판 등 우리가 평소에 보는 것들이 언어적 표현법이라 한다면 세세한 것들은 비언어적 표현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인간의 의사전달과는 비중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안의 장식들은 마치 인간의 비언어적 표현처럼 많은 의미들을 내포하며 자리를 잡고있다.


 

이제 책을 살펴보자


 

목차를 보면


 

1. 유교 정치의 이상과 상생의 징표, 2. 왕의 위엄과 권위, 3. 국가의식과 경천애민의 자취, 4. 지상에 구현된 우주, 5. 벽사진경의 기원을 담다, 6. 샐활의 멋과 운치


 

이런 목차들로 구성이 되어있으며 각 목차별로 여러 장식들을 소개하였다. 그중 2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서초


 


 


 

정전의 월대( 정전 앞쪽에 있는 평평한 대)의 계단을 유심히 보면 각 층계의 수직면에 넝쿨 모양이 있단 건 알 것이다.(물론 필자는 관심도 없어서 안 봤다.) 거기엔 풀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이를 서초라 한다. 5대 궁궐의 정전에 있는 계단의 서초 모양이 전부 다른 것도 특징이다.


 

서초는 유교에서 가장 높게 치는 요순임금중 요임금 시절의 일화에 나온 풀이다. 요임금의 궁궐계단에 풀이 자랐고 이를 명협이라 했고, 각 궁궐에 새겨진 상서로운 풀 문양(瑞草紋)은 명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처럼 계단의 간단한 문양에도 태평성대를 원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괴석


 

궁궐을 돌아다니다 보면 신기한 돌들이 가끔씩 눈에 띈다. 하지만 우린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단순히 이상하게 생긴 돌이 아니다.


 

조상들은 암석이 삼라만상 중 가장 불변적 요인이라 봤으며 바위는 세월을 초월해 벗삼을 정도라 여겼다. 그리고 괴석을 정원에 들여놓고 대자연의 운치를 느꼈다. 추사 김정희도 괴석의 운치를 소재로 시를 적었을 정도다


 

또한 괴석을 받치는 괴석분도 단순히 높은게 아니다. 괴석분엔 연꽃, 사자개, 두꺼비등이 새겨져 있다.


 

특히 두꺼비는 항아전설(달과 관련된 정설)과 관계되있어 두꺼비가 세겨진 괴석분이 있는 창덕궁의 연경당은 월세계이자 별세계로 해석할 수 있다. 단순한 괴석분에도 이런 디테일이 숨겨져있다.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책은 보다 보면 이 말이 생각난다. 아는 만큼 보인다. 정말이다. 모르면 그 안에 많은 디테일이 숨어있다 해도 전혀 모르며 그냥 단순 장식인가 혹은 단순한 조형물인간가 보다 넘어가지만 그 안의 장식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면 지식과 함께 재미도 함께 붙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한번 이 책을 보고, 혹은 가지고 다니며 궁궐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 책안에 있는 장식들을 찾으면서 다니는 재미와 동시에 이게 합해지면 이 궁궐이 어떠한 의미가 있나 유추할 수 있는 재밌고도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난잡한 글을 읽느라 고생 많으셨다. 평안한 하루가 되셨길 바란다.


음악과 종교-음악과 종교성은 분리되있는 관계인가? 그냥 내 생각


 



 


 

제목- 음악과 종교

작가- 한스 큉

출판사- 포노


 

이 책을 알게 된 건 음악입문서인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낼 것인가를 찾다가 알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 책은 음악의 길이란 시리즈 중 한권이었으며, 이 시리즈엔 다양한 책이 있었는데 지금 소개하는 책은 그 중 5번쨰 시리즈다.


 

이 책은 한스 큉이란 사제이자 신학자가 쓴 책으로 모짜르트, 바그너, 브루크너 이 세 작곡가의 음악과 그 안에 있는 종교성에 대해 다루었다. 맨 처음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카톨릭 사제이면서도 교황의 무류성에 대해 비판했으며, 카톨릭이지만 교회일치와 개혁이란 단어를 내세웠으며, 탁월한 저술가로 누구에게나 기초가 될 수 있는 책들을 저술헀으며, 그의 세계윤리 원칙을 바탕으로 곡마저 만들어졌을 정도다.(베를린 필 디지털 콘서트홀에 있으며, 세계윤리란 제목이다.) 그런데 이런 저자가 음악에 대해 글을 썼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ㅗ짜르트, 바그너, 브루크너란 탁월한 작곡가들이다. 즉시 구매한 뒤 단숨에 읽어 나갔다.


 

이 책의 전체적인 평을 먼저 한다면, 기존의 한스큉의 저서와는 좀 다르다. 탁월한 논리적 전개, 허점을 찾을수 없으며 책에 자연스래 바져들게 하는 기존 저서를 생각하면 조금 손색이 있을 수 있다. 책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한스 큉은 이 책을 쓸 때 신학자가 아닌 그저 한명의 애호가로서 책을 썼다. 그러다보니 전개가 논리적보다는 열정이 먼저 앞서는 면이 있다. 그것 말고 다 좋은듯 하다.


 

작가는 책을 하나의 서곡과 교향곡이 결합된 형태로 썼다. 서곡은 음악과 종교의 관계성, 1악장은 모짜르트. 2악장은 바그너, 3악장은 브루크너, 4악장은 현재 예술의 위치 및 예수이란 무엇을 위해 있는가에 대해 얘기한다.


 

서곡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의 99%의 내용이 책에 있는 내용 그대로다. 그리고 글 안에 있는 신학적 내용은 전부 쳐냈다. 이유는 단 하나다. 개인적 역량의 부족으로 완전히 소화를 못 시켰으며, 결과적으로 글의 내용이 서평이 아닌 책의 내용의 나열이 됐을 따름이다. 그래서 글이 이리 길어졌다. 양해의 말씀을 먼저 구하고 시작하겠다.


 

서곡- 이 책의 독자층이 분명히 정해졌다. 음악을 듣는 신앙인들이다. 저자는 초기 종교와 음악이 굉장히 인접했으며, 음악은 종교와 거의 같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기악 음악이 다성 음악으로 발전함에 따라 기악 음악은 종교와 완전히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기악음악의 표현성이 무제한임을 제시하며 기악음악에서 절대성을 엿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 것은 청자에게 달려 있음을 한가지 예시를 통해 보여준다. 바로 종소리다. 단순한 종소리지만 신앙인, 비신앙인 그리고 상황에 따라 종소리는 다르게 들릴 수 있단점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음악 감상이란 단순한 상황에도 절대자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1악장- 모짜르트


 

1주제- 신비를 찾아서: 내가 경험한 모짜르트 음악


 

저자는 자신이 경험하고 생각하는 모짜르트를 작가인 힐데스하이머와 개신교 신학자인 카를 바르트의 글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다. 그렇게 총 7개의 주제를 썼다. 그중 3주제, 4주제에 대해서만 얘기하고자 한다.


 

3주제와 4주제는 모짜르트의 신성화와 인간적인 면에 대해 다루었다.


 

3주제 모짜르트는 신적 존재였는가?

저자는 몇몇 음악가들과 작가들이 모짜르트를 신적 존재로 일컬은 몇몇 예시를 제시하며 모짜르트는 신성성이란 단어가 쓰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신격화가 되어있다 얘기한다. 2명의 음악가가 모짜르트를 어떻게 표현하는 지 옮겨보자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체- 지상에 내려온 하나님

지휘자 요제프 크립스- 모짜르트가 그의 음악들과 천국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봤다고 함


 

작가는 신적인 모짜르트가 아닌 또 다른 모짜르트에 대해 얘기하려면 인간적인 모짜르트에 대해 얘기할 수밖에 없냐며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4주제-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근래의 모짜르트 연구들의 공적은 신성적, 영웅적 모짜르트는 다 걷어내고 인건적인 모짜르트를 찾아 썼단 것이다. 이는 그의 유치하며 무례한 행동, 그리고 그 기괴한 편지들(그 유명한 항문성애와 배설물에 대한 표현)들과 아마데우스란 영화도 모짜르트의 신비를 걷어내는데 한몫했다. 하지만 이는 너무 난잡해졌다. 미국의 급진적 비평가들은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17번에서 명백한 사회적 소외가 읽히며 밝은 피날레로 억압을 은폐할 뿐이란 논평을 헀다. 모짜르트란 현상은 신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읽힐수 있는 수수께끼다. 그런 불가사의를 풀진 못하도 전보단 자세히 설명할수 있지 않을까 라면서 불가사의란 챕터로 넘어갔다.


 

이 부분부턴 여러분들이 직접 읽고 판단해주셨음 한다.


 

2주제- 민중의 아편인가? 시대사적 지평에서 본 모짜르트의 대관식 미사

시작하기에 앞서, 편의상 책의 순서와 글의 순서를 바꿔서 쓴 부분이 있다. 양해를 바란다.


 

굉장히 도발적 제목이다. 마르크스의 이 말은 지금도 쓰여질 정도다. 하지만 이 제목은 어찌보면 적절하다. K317 대관식 미사는 1779년에 쓰여졌다. 잠시 교회양식에 대해서와 1770년대의 시대적 배경과 모짜르트 개인에 대해 말해보자


 

브루크너에서 자세하게 다루겠기에 이 말만 하고 넘어가겠다. 음악적으로 교회양시깅란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의 구분은 비역사적이다.


 

1517년 종교혁명이 일어났고, 개혁주의적 성향을 띈 사제들은 전례개혁에도 앞장섰다.(간단히 말해 미사시간의 축소 및 기존 교회음악과 다른 음악의 확립이다.)곡의 길이도 짧아져야 했으며, 이탈리아의 기교위주, 연주회 음악처럼 바뀌어 가는 것도 막아야했다. 1770년대 잘츠부르크는 특이한 형태의 도시이자 국가였다 교회와 왕권이 하나가 된 대주교 군주국이었고, 당시엔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백작이 대주교였다. 그는 개혁주의 성향을 띈 사제이기도 했다. 그는 모짜르트에게 새로운 미사곡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의 모짜르트에겐 거대한 도전이었으며 아예 다른 양식을 공부해야 했다. 1시간 가까이 되던 음악이 약 30분이내로 압축이 되야 했다. 거기다 모짜르트는 잘츠부르크에 싫증이 나 있었다.

그래서 파리를 가기 위해 대주교이자 봉건군주에게 사직을 요청했고 그의 아버지까지 쫒겨났다. 모짜르트는 대주교를 저주하며 파리로 왔고 모짜르트는 파리에 왔다. 그리고 2년간 모짜르트는 그곳에서 플루트 협주곡, 파리 교향곡 같은 아름다운 곡들을 만들었지만 그곳에서 또다른 목소리와 시대의 시작하는 전모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파렴치를 타도하라' 그러기에 새로운 교회음악인 대관식 미사의 키리에 부분은 또 다르게 들릴 수 있다.


 

주님 자비를 배푸소서


 

대관식 미사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주장하는 카를 마르크스의 정의에 부합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유혹적인 음악에 담긴 종교는 '인민의 아편' 이라고 했으며 이제는 '높은 곳에서 호산나'가 아니라 혁명의 팡파르가 저 아래로부터 울려퍼져야 한다. 란 주장을 펼쳤다.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대관식 미사만큼 이 말에 어울리는 곡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있어 신앙고백(보통은 니케아, 사도신경을 일컫지만 미사도 소급시켜 애기하겠다.)을 드릴 때 생각해야 한다.

종교비판을 무시하며, 신은 허상이란 의혹에 맞서지 못하며, 종교비판의 도구를 우리에게 적요하지 못하면 신앙이 아니다. 신앙고백은 바뀔 수 없는 단어다. 하지만 모든 단어는 언제나 새롭게 이해되야 한다.


 

그리고 저자는 혁명도 인민의 아편일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근대의 이데올로기들이 유사종교로 변질됐고 다시 종교로 회귀했다는 말과 함께 인민의 아편과 관련된 주제를 끝내고 대관식 미사 안의 신학적인 면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부분은 따로 말하지 않겠다.


 

다음 악장으로 넘어가보자


 

2악장 바그너- 신학에 있어서 바그너는 미지의 영역이다. 카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파울 틸리히의 조직신학, 각 권이 800쪽에 총 36권인 신학백과사전에도 바그너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그만큼 미지의 영역이다. 2악장은 바그너와 종교의 난해한 관계를 말하고자 한다.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바그너에 대해 먼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듯 하다. 책에 있는 내용으로만 쓰도록 하곘다


 

1813년생인 바그너는 1830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을 계기로 혁명가들의 편에 섰으며 바쿠닌, 뢰벨과 친분을 가졌다. 그는 도덕적 사회질서 확립, 예술의 확립, 새로운 연주와 음악의 탄생을 말하며 혁명을 지지하였다. 1848-49년 드레스덴 봉기때는 출판물을 배포하며 열렬하게 혁명에 가담했지만 실패로 끝났으며 망명을 떠났다. 또한 그는 시간이 흘러 바이에른 왕인 루트비히 2세와 친분을 쌓고 혁명 이후의 실패 분위기에 편승했지만 그는 여전히 급진적이며 사회 비판적인 면을 고수했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자유연애 사상을 고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그는 열성적인 포이어바흐 지지자였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영향도 상당히 받은 면이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영향은 포이어바흐에게 받았다. 바그너는 포이어바흐에게 자신의 저서인 미래에의 예술작품을 헌정할 정도로 열성적인 포이어바흐 지지자였다. 여기서 포이어바흐에 대해 거론해보자. 포이어바흐는 19세기 계몽주의를 급진적으로 이끈 인물이며, 신의 개념은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는 것이며 신성은 초월세계로 투사한 인간성이란 주장을 했다. 그는 신앙의 자리에 불신앙, 성경의 자리에 이성을, 종교와 교회의 자리에 정치가, 천당 대신 지상이, 기도 대신 노동이, 지옥 대신 물질적 빈곤이, 기독교인 대신 인간이 드러설 것이라 하며 기독교의 종말을 예견했고, 바그너는 이런 포이어 바흐의 열성적 지지자였다.


 

바그너와 포이어바흐에 대해 거론했으니 본론으로 넘어가겠다.


 

1주제- 신들의 황혼뒤엔 무엇이 오는가? 시대사적인 지평에서 본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바그너의 반지에서 나타나는 것은 크게 3가지다. 신화 드라마, 탈신격화, 구원이다.


 

1848년 바그너는 지크프리트의 죽음이란 영웅오페라를 만들 예정이었다. 여기엔 영웅의 신격화, 신들의 영원한 권력이 보인다. 하지만 반지는 그렇지 않다. 탈신격화와 결과가 안보이는 구원이 있을 뿐이다. 탈신격화 관련해선 여러 말이 있지만 한스큉은 반지를 통해 바그너가 말하고자 한 것은 근대사회와 기존 사회의 대립이란 것이다.


 

근대 이전의 세계는 종교가 정당성이었다. 하지만 자주성을 열망하는 개인(근대적 혁명)에 의해 중세 사회도 끝이 나고 사회계약 즉 개인의 재산권, 헌법, 법률은 신과 왕이 있던 곳에 들어섰다. 하지만 바그너에게 있어서 근대적 혁명이 나아간 곳, 그리고 그 결과는 오히려 종말이다. 바그너의 반지에서 신성성을 띄고 있는 것은 시민사회의 세계다. 결코 문명 이전의 상태가 신성성을 띄지 않는다. 보탄이 계약을 맺은, 즉 사회적 계약을 맺은 곳은 신들의 사회다. 반지에서의 대립상황은 문명이전의 자연상태와 자연을 더럽히는 정치질서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에서 얻어진다. 그리고 신들의 황혼은 사회적 계약을 맺은 공동체 즉 시민사회의 종말을 의미한다. 니체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바그너는 근대성이 무엇인지 요약한 것이다.'


 

구원- 바그너는 작품의 곳곳에서 구원에 대해 얘기하였다. 특히 탄호이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구원에 대한 내용은 잘 드러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대체 반지에 나오는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 지크프리트? 브륀힐데? 군터? 알베리히? 보탄? 구원의 필요성은 있다. 하지만 구원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모든 등장인물은 죽었으며, 신들의 세계도 불타 없어졌다. 권력을 추구했건,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건, 사랑을 추구했건 전부 다 죽었다. 오직 남은건 탐욕만 있는 알베리히 뿐이다.


 

여기서 우린 포이어바흐적 결말도 아님을 알수있다.(반지의 구상과 첫 대본은 소펜하우어를 읽기 1년 전인 1853년에 끝마쳤고, 바그너는 염세주의자가 아니다.)포이어바흐는 사랑이 행복을 준다고 했기에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결말이다. 그럼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면 신들의 황혼 뒤에는 대체 무엇인가


 

이는 1870년대에 포이어바흐와의 거리두기와 1880년에 쓴 종교와 예술이란 논문에서 알 수 있다. 바그너는 이 논문에서 인위적인 종교(기독교든 뭐든 모든 종교)를 반대하며 인간의 연민에 의해 결정되는 종교의식을 얘기한다. 또한 루트비히 2세에게 보낸 편지는 어떠한 작품이 신들의 황혼 뒤에 오는 것을 보여준다.


 

파르지팔이다.


 

구원의 필요성을 보여준 신들의 황혼 뒤에는 파르지팔이 오며, 파르지팔은 이상향적 미래와 마지막 구원을 보여준다.


 

구원을 향한 열망: 바그너의 파르지팔- 엄청 고민했다. 이 주제는 굉장히 형이상학적 주제를 가득 담고있다. 안그래도 책 내용을 거의 베끼는 수준인데 이 챕터는 거의 다 써야할 지경이다. 그러므로 이 한문단으로 마치겠다


 

파르지팔의 내용을 따른다면 구원은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곳, 고통당하는 인간과 동물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지혜와 참된 깨달음과 이세상에서의 새로운 섬김으로 이끄는 곳,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브루크너- 이 글도 편의상 책의 글 순서와 맞지 않게 글의 내용을 썼다, 또한 앞의 글과 다르게 필자의 의견도 조금 들어있다. 참고해서 보기 바란다.


 

먼저 이 글에서는 교회음악가 브루크너가 아닌 교향곡 작곡가 브루크너에 대해 적혀져 있다. 하지만 많은 작품에 O.A.M.D.G(모든 것을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로 서명한 브루크너를 얘기하기에 앞서 교회음악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모짜르트의 대관식 미사를 얘기할 때 언급했지만 교회음악과 대중음악을 나누는 것은 비역사적이다. 이는 그레고리오 성가조차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레고리오 성가는 19세기에 정립되어 보급되었으며, 실제로는 6세기의 그레고리우스 대교황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로마성가란 단어 조차도 9세기 카롤링거 왕조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다. 카롤링거 왕조는 왕국의 통일과 교황과의 화합을 위해 로마전례를 도입하기로 결정하며 로마성가란 단어를 만들었다. 19세기에 보급된 그레고리오 성가는 고대 로마가 아닌 중세 프랑크왕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레고리오 성가라 부르는 것은 19세기에 솔렘 베네딕토 수도원이 다시 정리한 성가들을 그레고리오 성가라 칭하는 것이다.


 

브루크너에 대해 말해보자, 브루크너는 종교적인 작곡가이다. 하지만 시대는 그의 종교음악을 원하지 않았다. 그 시대의 교회는 16세기의 팔레스티나와 그레고리오 성가를 제외한 종교음악을 원하지 않았기에 교회에서 그의 후기 교향악적 종교음악은 교회에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작곡은 언제나 그의 기독교적 믿음을 기반으로 하였다. 그에게 모든 음악은 종교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의 음악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종교적인 의미였다.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의 구분은 비역사적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을 이 말에 대입한다면 어느 범주에 속할까?

이 뒤는 현재의 음악에 대한 비판과 브루크너의 총체적 통찰이 현재의 음악적 위기를 해결할 발판이 될수 있단 내용이다. 현대음악을 비하하는 면이 보여 과김히 생략하겠다.


 

4악장 예술의 의미- 마지막 악장은 음악이 아니라 현재 현대예술의 상황과 현재의 위기상황을 어찌하면 타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작가 나름의 생각이 담긴 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현재의 예술에 대해 공감했으며 그 조언도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좋은 악장이다. 하지만 개인적 역량이 딸려서 요약이 안된다. 직접 읽어주심 감사하겠다.


 

마무리하겠다


 

앞서 말했듯 책의 독자층은 클래식을 듣는 신자들이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신학적 내용들을 제외하면 신앙인이 아닌 일반 애호가분들도 재밌게 읽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른분들도 꼭 한번쯤 읽어 보셨음 좋겠다.


 

길고 난잡한 글을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다. 오늘 하루도 평안하길 바라는 바이다.


19.07.05 2019 서울시향 모짜르트와 브루크너(수정)



 

날짜- 19.07.05

공연명- 2019 서울시향 모짜르트와 브루크너 CATHEDRALS IN SOUND

지휘자- 안토니 헤르무스

협연자- 틸펠너(Piano)

관현악단- 서울시향

공연장- 예술의 전당


 


 


 

오늘 공연도 어찌저찌 좀 늦게 알게 된 공연이다. 난 맨날 이런거엔 좀 많이 늦다고 생각한다. 뭐 그래도 적당한 자리도 얻었고, 공연 2주전부턴 나름 하루에 한번씩 브루크너 모짜르트 이런식으로 예습을 했으니 그래도 공연 감상 준비는 나름 잘 한 듯 하다. 그리고 오늘로서 알았다


 

공연의 만족도는 얼마나 예습하느냐 그리고 기대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달렸단 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오늘 공연이 못했단 소리가 아니다. 정말 잘했다. 그저 나 자신의 마음먹기를 어떻게 하냐에 달렸단 소리를 하고 싶을 뿐이다. 쓰잘대기 없이 공연수준을 엄청 높게 생각하고, 곡을 좋아한다고 좋은 공연 보여줘야해! 하면서 기대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곤란하다 여긴다. 현실적으로 다가가야지…


 

또한 예습을 좀더 많이 하면 듣는 것이 많아지고, 재밌게 들을 수 있는 듯 하다 하하하


 

그리고 콘서트장 로비를 보고 놀랐다. 뭔일로 외국인들이 이리 많지? 싶을 정도였다. 오늘 대사라도 왔나? 이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그런데 이건 브루크너 때 알게 됐다. 외국인 객원들을 엄청 불렀다


 

잡설이 길었다 공연으로 넘어가자


 

1부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은 과장이 아니라 하루에 한번씩은 꼭 듣는다. 그게 몇 번이 됐든 간에, 들을 시간이 안나면 짧게 하프시코드 협주곡이라도 듣는다. 그리고 나름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좋아하는지라 전집도 제르킨, 브렌델 두개가 있다. (지금 한 개를 더 들일까 고민중이다. 부흐빈더도 좋다고 하고, 게자 안다도 좋을텐데… 여러분들의 추천을 부탁드리는 바다) 그정도로 좋아한다. 오늘 공연예습은 제르킨은 20번이 없는 관계로 브렌델의 연주를 중점적으로 들었다.


 

개인적으로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의 실연 감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아주 기대를 했다. 그런데 7월 4일 롯데 콘서트홀 가신 분들 평이 영 안좋길래 기대감을 거의 끝으로 내려놨다. 괜히 기대했다가 혼자 기분 팍 상할까봐 말이다. 그런데 왠걸! 나의 기준으로는 굉장히 좋은 공연이었다.


 

먼저 모짜르트의 음들이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음들이 내 귀로 들어왔다. 특히 브렌델의 연주를 생각하게 하는 음들이었다. 정말 놀랬다.


 

오늘 연주에서 피아니스트는 여러가지 기교를 부렸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부분이다. 특히 모짜르트에서는, 모짜르트의 음들은 그 자체로 완벽하기에 거기에 절대로 뭘 더하거나 빼선 안되며 바꿔쳐서도 안된다 생각한다. 꾸밈음은 무슨, 그냥 그대로 치면 되며, 카덴짜도 화려하게 쳐선 안된다 여길 정도다. 분명히 피아니스트 재량일텐데 난 이렇게 생각하고 들었다. 오죽하면 브렌델의 음반을 처음 들었을때는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들었다.


 

제르킨은 안 이랬는데 제르킨은 카덴차도 짧게짧게 꾸밈음도 극도로 없었는데, 제르킨은 제르킨은… 끝이 없을 정도였다. (요즘은 브렌델을 더 자주 듣는 게 함정이지만…)


 

그런데 오늘 공연으로 배운게 있다. 피아니스트가 꾸미고 싶음 꾸미고, 카덴짜도 화려하게 할수 있는거다. 물론 평소 같았음 과하다 여겼겠지만 잘 치니 문제되는게 하나 없었다. 틸펠너는 좋은 피아니스트라 생각한다.


 


 

예전에 갤러리에 이런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시향 공연은 어째서 목관이 1부랑 2부랑 다른가


 

맨 처음 이 말을 듣고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이런 불만이 튀어나올까… 이런 생각을 했다. 오늘공연으로 알았다. 정말 1부랑 2부가 아예 다른 사람인 듯하다. 내가 눈감고 듣느라 누가 누군지 체크 못했지만 분명하다.


 

만일 같은 인물이라면 좀 웃기다고 생각한다. 이쯤 되면 보이콧이다


 

맨 처음 오케가 연주하고 피아노가 답하고, 초반부는 좋았다. 정말 잘한단 생각까지 했다. 와 모짜르트 피협 처음 듣는데 손에 꼽을 만한 공연을 오늘 들을 수 있는 것 인가 란 기대를 엄청 하였다. 목관이 나오기 전까지…


 

정말 잘했다 생각한다. 피아노와 오케가 균형 있게 잘 나아갔고 좋은 음들을 내주었다. 하지만 목관음이 처음 나올 때부터 엄청 불안하더니 2악장에서 정점을 찍었다.


 

2악장에는 목관이 중요한 파트가 있다. 목관과 피아노가 대화를 한다고 봐도 무방한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서 피아노 소리에 목관이 묻혀버렸다. 하… 여기가 롯…. 말을 말자


 

내가 1층 c블럭 6열에서 들어서 피아노 소리가 좀더 중점적으로 들렸고 그래서 목관이 묻혀버린 것 일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오늘 피아노 터치가 거의 안 들릴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럼 이정도 터치도 못 뚫은 목관은 대체 뭐가 되는 건가? 듣다 한숨이 나왔고 한숨 쉬려다 참았다.


 

하도 황당해서 잠시 눈을 뜨고 목관 누군가 쳐다보려 했는데 피아노에 가려서 안보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눈감았다.


 

그리고 목관에 하도 안 좋은 생각이 있어서 그런가 3악장 카덴짜 끝나고 목관이 바로 연결되지 않아서 목관이 진짜 정줄놨나 싶은 마음이 팍 들었는데 이건 브루크너때 알게 됐다 어쩜 지휘자가 일부러 끊은 것 일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오늘 협주곡에선 다른 파트는 각자의 파트를 충분히 다 했다고 생각한다. 하… 그냥 넘어가자


 


 

2부- 브루크너 8번


 

오늘 공연의 하이라이트이자 오늘 공연의 모든것이나 다름없는 곡 아니었을까?


 

예매하면서 걱정한 것이 하나 있었다. 보통 브루크너 8번을 연주하면 앞뒤로 프로그램 하나도 없이 이거 하나만 연주한다. 그런데 오늘 공연은 모짜르트 피협 20번도 같이 연주해서 좀 걱정했다. 그래서 걱정이 먼저 앞섰다. 그래도 그런 걱정에 비해 충분히 괜찮은 공연이었다.


 

확실히 브루크너 자체가 난곡이다. 특히 금관에게 있어선 거의 죽음의 곡이나 다름없다. 1악장, 4악장 끝날 때 세상 떠나가라 팡파르 터뜨리려면 여간 힘든게 아닐거다.


 

여기서 잠시 대전시향과 비교해보자. 그 때의 브루크너는 전체적으로 안 맞았다 생각한다. 계속 미묘한 틀어짐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서울시향은 전체적으로 잘 맞았다. 물론 몇몇 부분이 아쉽긴 했지만 충분히 이정도면 감수하고 들을만하다 여겼다.


 

1악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놀람의 연속이었다. 진짜 이 퀼리티로만 계속 연주하면 뭔가 나오겠다 생각했다. 뭐 결국 그렇진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런데 브루크너를 엄격히 연주하는게 굉장히 어렵나… 내가 말하는 엄격은 템포를 일정하게 가며, 각 악기가 나올 때 나오고 아닐 때는 빠지는 걸 의미한다.


 

2악장인가 4악장에서 갑자기 음이 질주를 했고 난 당황했다. 뭐 이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으니 넘어가자. 물론 브루크너에 또 뭘 섞는가? 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브루크너 스럽게 벨런스 조절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3익장 중간에 음이 묘하게 끊어진 부분이 있었다. 브루크너 휴지라고 보기엔 뭔가 부자연스럽다 여겼다. 이건 모짜르트때도 그랬는데 브루크너에서도 또 시도한 듯 하다. 내 생각으로는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라 본다. 브루크너 휴지도 아니고 그냥 단순히 음이 단절됐다 다시 복귀되는 수준이니…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적했듯 트럼팻은 상당히 아쉬웠다. 4악장에서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었는데 아마 트럼팻이 주 원인인 듯 하다.


 

오늘 공연에 불만이 있을 수 있고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도 전체적인 완성도, 벨런스는 확실히 좋았다고 생각한다. 외국인 객원을 아낌없이 채워서 음량과 퀼리티를 올리려고 노력한 것이 귀에 들릴 정도니, 특히 호른이 대단했다 생각한다. 2악장인가 3악장에서 호른음을 길게, 그리고 소리를 일정하게 끌고 간 것에 감탄했다.


 

지휘자 얘기를 안할 수가 없다. 누가 그랬다. 저 지휘자를 보고 있자니 내 허리가 다 아프다. 투명의자 만렙인가?


 

브루크너 2악장은 눈을 뜬 상태로 들었는데 정말… 무릎이 굉장히 강건하신 분이라 생각한다. 내 나이보다 못해도 20~30살은 많으신 분 같은데 무릎나이는 나보다 못해도 5년은 젊으신 분 같다.


 

그리고 에너지가 넘치시는 분이다. 등장하실 때도 느끼고 2부 끝나고서도 느꼈지만 에너지 하나는 굉장하시다.


 

다른 지휘자들이라면 이런 대곡을 끝내면 지쳐서 그냥 인사 몇번하고 갈텐데 와… 엄청난 에너지다.


 

힘차게 답례를 받아주고 수고했다며 금관 섹션들 하나하나 인사시키고, 목관에 현악 섹션 하나하나 다 인사 시키신다. 특히 콘트라베이스에선 놀랬다. 지휘자가 악장 제외하고 악수하러 직접 가는 것은 처음 보는데 포디움에서 나름 먼 콘트라베이스 세션까지 가서 수석으로 생각되시는 분에게 직접 악수까지 다 해줬다. 물론 오늘 콘트라베이스 훌륭했다. 그 풍부한 음에 깜짝 놀란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첼로 수석과 비올라, 제2바, 그리고 악장까지 악수를 직접 다 하셨다. 그리고 또 청중에게 힘찬 화답 와… 공포의 체력이다. 누구는 집에 오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려서 5분간 누워있었는데… 운동하자 하…. 지휘자 체력에 감탄하면서 이렇게 글을 길게 적기 쉽지 않은데 그걸 해내게 만드시는 분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휘를 잘했으니 체력 좋은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이지, 지휘를 개판으로 했음 뭘 잘했다고 저러나 싶었을거다. 다시 말하지만 지휘도 잘했다.


 

글을 마치겠다.


 

오랜만에 공연에 집중도 잘 되고 즐겁게 감상문을 써보는 공연이다. 개인적으로 오늘 공연이 한국 관현악단에게 기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연이라 생각한다. 좀더 좋은 공연들이 있다면? 나야 좋지, 안 그래도 외국 오케스트라 내한하면 돈이 없어서 못가는데… 아 빈필…


 

정말 이런 공연들이 자주 나와서 모두가 만족하는 감상라이프가 계속되길 바라는 바이다.


 

길고 난잡한 글 보느라 고생 많으셨다. 모두들 평안한 하루, 즐거운 주말 되시기 바라며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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