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로봇 도라에몽의 주관적인 블로그

asembley.egloos.com


포토로그


하나님과 팬더믹- 해석하지 말자, 기도하자


 


 



 


 

이 책은 8월경에 구매하였다. 이유는 코로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관점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란 주제는 나에게 있어서 두가지의 의미를 지녔다


 

첫째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코로나 때문에 정말 많은 피해들이 뉴스를 통해서도 나오고, 재난알림문자를 통해서도 나에게 온다. 그러다보니 코로나란 주제는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주제기도 하다.


 

둘쨰로는 개신교인으로서 과연 코로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이다.


 

먼저 일부 개신교 혹은 미국 기독교분들의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너무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코로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미국인분은 자신이 보혈에 덮혀 있으므로 나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고 당당히 인터뷰하였다. (참고1.)


 

아니 이게 말이 되는가? 자신이 안 걸리면 끝인가?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생각 하는 거지? 제정신인가? 라는 생각을 들게 하였으며 이 지독한 이기주의에 대해 생각해봄과 동시에 같은 기독교인들은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또한 코로나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여러 교회들이 사용하는 예언적 단어들이 굉장히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코로나를 가지고 여러 설교문과 기도문을 만들 수 있지만 예언적 단어를 사용하거나, 특정 집단만 걸린다.(EX: 불신앙인만 걸릴 뿐 신앙인들은 걸리지 않는다.) 혹은 코로나 심판론을 내세우는 설교 혹은 기도는 정말 이기적이며, 심각한거라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교단은 이에 대한 지침을 따로 내렸다.(참고2.)


 

앞에서 말한 코로나 심판론을 주제로 설교한 뒤, 교인들이 코로나에 걸린 교회들도 존재하머(참고3.), 정부에서 비대면예배를 실시해달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참고4.) 새벽예배를 강행하다 코로나가 걸린 사례도 있었다. (참고5.)


 

사례는 너무 많으므로 그만 열거하겠다.


 

결론적으로 나는 일부 이기적인 개신교분들의 사고방식이 이해가 안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며,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코로나에 대해 바라보는 인식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바라보는 시각과 다른, 또다른 시각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보다 톰 라이트 주교란 분이 쓴 글의 내용을 알게 되었고 내가 생각하는 혹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시각이어서 책을 구매하였다.


 

그리고 이 책이 굉장히 맘에 들었고, 초대교회사와 어떻게 이 책을 엮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8월 15일에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 벌어져서 한동안 글을 쓸 생각을 못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제 이 책을 한번 소개해보자 라는 마음이 들어서 이렇게 몇 자 쓰고자 한다.


 


 

먼저 저자에 대해 간단히 적자면


 

옥스퍼드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케임브리지, 맥길, 옥스퍼드 같은 유명한 대학교에서 신약성서학을 가르쳤으며, 현재는 옥스퍼드 위클리프 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사제이다.


 

그에 대한 여러 비판들이 있지만 너무 길기에 참고링크를 확인해주시기 바란다.(참고6.)


 

그럼 이제 본문으로 넘어가보도록 하겠다.


 

이 책은 서문과 1장-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2장-구약성경 읽기, 3장- 예수님과 복음서, 4장- 신약성경 읽기, 5장-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로 이뤄져 있으며 서문 및 각 장을 짧게 요약해서 쓰고자 한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말한다.


 

팬더믹이 불러 일으킨 질문들에 대한 해결책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쉽게 떠오르는 자동적인 반응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급히 해결책으로 나아가지 않고 애통하고 자제하는 시간이 필요하며, 이를 상당시간 기도하다 보면 반복보다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1장에서 저자는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질문한다.


 

먼저 저자는 이전의 팬더믹처럼 우리는 이번 팬더믹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란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팬더믹과 다른 양상을 띄고 있으며, 머나먼 중국에서 일어날 뿐일 일이라 바라봤지만, 이제 런던에 이어 뉴욕까지 순식간에 팬더믹이 덮쳤으며, 이제 안전한 장소는 없다 말하였다.


 

그리고 고대세계에선 주요 재난은 분노한 신과 연결되어 있다 말하며,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을 열거한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에피쿠로스학파와 같은 쾌락주의자라고 말한다


 

'이들은 그저 안락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남들과 격리된 채 넷플릭스를 즐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면서(16p)'


 

그리고 일부 그리스도인과 일반인들은 다른 시각을 선택한다. 특히 플라톤과 같이 생각한다


 

'죽음은 최악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곳을 향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침착하자. 대신 교회(또는 골프클럽)문만 닫지 말아달라.(16p)'


 

2~3세기 기독교인들이 전염병이 돌았을 때 자신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며 사람들을 돌본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저자는 기독교적 음모이론은 성경 여기저기서 짜집기한 내용을 근본주의자적 신앙과 엮어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만들었으며, 코로나란 상황을 통해 이를 이용하여 온갖 이론을 통해 종말의 징조라고 말을 한다. 누군가는 이떄를 이용해 전도하려 하며, 구약성경을 이용하여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하였다.


 

저자는 구약성경이 우리의 출발점이라 말을 하며 실마리가 되는 본문들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약 2천년전 본문을 과연 지금 세상에 바로 가져다 쓸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2장은 예언자들을 열거하며 이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고 안타까운 상황임을 말하며, 여러 구절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바빌론 유수는 히브리 성경의 재앙 중 가장 큰 재앙임을 말한다. 그리고 위애서 말한 구절의 특징을 설명하는데, 국가적, 역사적 차원의 재앙에서 회복하기 위해선 개인적 관점에서도 동일하게 봐야 한단 말을 한다.


 

또한 잘못된 행동과 불운을 항상 피해자와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엮으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행동은 늘 있어왔다 얘기한다.


 

하지만 위의 말들과 대비되는 구절을 예시로 든다. 시편 44편 17-22절이다


 

17.우리는 주님을 잊지 않았고, 주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닥쳤습니다.

18.우리가 마음으로 주님을 배반한 적이 없고, 우리의 발이 주님의 길에서 벗어난 적도 없습니다.

19.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승냥이의 소굴에다 밀어 넣으시고, 깊고 깊은 어둠으로 덮으셨습니다.

20.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었거나, 우리의 두 손을 다른 신을 향하여 펴 들고서 기도를 드렸다면,

21.마음의 비밀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이런 일을 찾아내지 못하셨겠습니까?

22.우리가 날마다 죽임을 당하며, 잡아먹힐 양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은, 주님 때문입니다.


 

시 44:17-22


 

그리고 욥기를 예로 들며 죄 때문에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님을 얘기한다. 하지만 욥기엔 해결책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미해결책을 욥기의 특징이라 얘기하며, 우리가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린 이런 상황들을 하나님께 맡겨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이 맞다는 것을 친히 선언하신다.(참고7.)


 

그리고 욥의 이야기를 가져다 사용했을 뿐 아닌 그 이야기대로 사시고 죽으신 분을 말한다. 바로 예수다.


 


 

3장은 예수님과 복음서에 대해 얘기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인용한 고대 예언자들과 같이,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다니셨다. 하지만 그분은 고대 예언자들과 같기도 다르기도 하다. 구체적인 예들을 들어 예언하기도 하였고, 이스라엘의 임박한 멸망을 말하였으며, 시대의 표적을 읽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과거의 표적만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셨다.


 

아모스, 모세의 표적처럼 희안한 것들이 아니었다. 새로운 창조들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신 일들을 내다보신 것이다.


 

이는 요한복음에도 나온다.


 

요한복음에는 태어낼 때부터 눈먼 사람이 어찌하여 이렇게 됐나, 이 사람의 죄냐, 아님 부모님의 죄냐 라고 제자들은 질문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손쉬운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죄 한 개가 들어가면 죄 한 개가 나오는 자동판매기 신학을 무너뜨리는 대답이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보이시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


 

즉 가상의 원인을 돌아보지 않으셨다. 앞으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 지 내다보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부활을 통해 궁극적인 표적이 되셨으며, 이러한 예수님을 우린 어떻게 믿어야 하며,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세상 사건들을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저자는 신약성경의 나머지에서 이 답을 찾아보자 얘기한다.


 

결론적으로 말하겠다.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부활하여 승리하신 하나님이 아닌, 우리를 책임져 주시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하나님이 아닌, 친구의 무덤 앞에서 우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결국 우리의 소명은 고통받는 세상에서 말 없이 기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기도할지 모른다. 하지만 기도하자. 이 무지의 순간이야 말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밀한 삶에 사로잡히는 순간이니.


 


 

5장에선 먼저 우리가 탄식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 말을 한다.


 

기독교인의 표준 기도는 주기도다. 그 기도에는 회개의 요청이 나타나며,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한다. 그리고 이 코로나를 기회로 전도를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평한다.


 

'유행병이 돌아야 그렇게 할 정도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 예수님의 명령만으로 부족했단 말인가?(98p)'


 

그리고 모두가 안전하지 못한 이 때는 결국 탄식의 때라 인정해야 하는 것이라 말하며, 우는 사람들 사이에 겸허히 자리잡는 것이 중요하다 말한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기에. 그리고 슬퍼하며 애통해하며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저자는 어떻게 현재를 살아갈지에 대해 말을 한다.


 

저자는 2-3세기의 초대교회가 한 것처럼 자리를 지키고 도우라 말한다. 그리고 탄식의 기도를 할 때, 애통하며 기도할 때, 권력자들에게 해야 할 일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소명이 나타날 것임을 얘기하며, 현재 교회가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상황이 아닌, 세상과 맞닿아 있으며, 현재상황에 최선의 도움을 다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의 원래 의미를 회복되야 함을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를 얘기하였는데, 저자는 단순하게 코로나에서 회복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얘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코로나 이전의 부조리한 실상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공의로운 세계로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 지를 얘기한다. 그리고 이런 세계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행동해야 하고, 좋은 지도자들이 나와야 함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팬데믹의 현실속에서 애통해하며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본질이며, 우린 그 기도의 제목을 모르고 막막하지만, 그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사로잡히며


 

우린 코로나의 상황이 끝나는 것 뿐 아닌, 그 전의 사회에서 부조리하고 공의롭지 못한 삶이 다시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행동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코로나란 상황 가운데 이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서 정말 많은 책들이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상황을 해석하지 말라 한다. 그저 애통해하며 아픈 사람 가운데 있으라 한다. 그리고 뉴 노멀의 시대는 기존의 부조리하고 다른 공의로운 시대가 되길 기도하자고 한다.


 

나는 코로나의 상황에서 자문자답처럼 여러가지 질문을 했고, 생각한 부분도 있지만 생각치도 못한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이 책으로 여러 생각들을 하며 또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도움을 받았다. 여러분들도 이 책으로 새로운 시각을 얻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책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려고 길게 쓴 부분도 있지만, 신학적 부분들이 너무 많다 싶음 쳐 냈다. 어떻게 느끼실 지 모르지만 최대한 신학이 아닌 일반적으로 통용할 수 있는 글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느낀다


 

이 책의 수요는 분명히 믿는 분들을 위한 책이다. 하지만 믿지 않는 분들도 새로운 시각이라 생각하시고 읽기에 괜찮은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좋은 점을 이 글이 얼마나 담아낼지 모르지만, 이 책은 내 글보다 훨씬 좋은 책이다.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동하신다면 꼭 구매하시길 권한다.


 

긴 글을 읽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모두들 코로나 조심하시길 바라며, 평안한 밤이 되길 바란다.


 


 


 


 

참고링크

참고1. https://edition.cnn.com/videos/us/2020/04/04/ohio-church-service-covid-19-pandemic-tuchman-pkg-ac360-vpx.cnn

참고2.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0126

참고3.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0318

참고4. https://www.yna.co.kr/view/AKR20200818138552001

참고5.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1204
참고6. https://ko.wikipedia.org/wiki/%EB%8B%88%EC%BB%AC%EB%9F%AC%EC%8A%A4_%ED%86%A0%EB%A8%B8%EC%8A%A4_%EB%9D%BC%EC%9D%B4%ED%8A%B8

참고7. http://www.holybible.or.kr/B_SAENEW/cgi/bibleftxt.php?VR=2&CI=4650&CV=99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레토릭이 아닌 실제적 초대교회 그냥 내 생각


 


 



 


 

초대교회란 단어는 목회현장뿐 아닌 신학계에 있어서도 굉장히 많이 쓰이고 있다. 특히 목회현장에선 매주 어느 교회든 쓰는 단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초대교회, 그리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실체라곤 없는 레토릭이라 봤기 때문이다.


 

대체 초대교회란 무엇인가, 초대교회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구호는 실질적으로 아발론을 향해 전진하자 라는 단어와 전혀 다를 게 없다 생각한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대한 입문서를 찾아보려 해도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저자도 서문에 초대교회에 대하여 신학적 입장이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입문서가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대중과 교회의 수요가 있음에도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풀어서 해설해 준 초대교회 관련 역사서를 찾기 쉽지 않단 점이다. 그 이유는 아마 한국 신학계의 교회사 전공자 대부분이 역사학 방법론을 훈련 받기보다는 신학 훈련의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물론 역사적 접근과 신학적 접근이 전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더라도 그 차이는 무시 못할 정도로 크다.(10p)'


 

이 책을 구매할 때는 저자의 이름만 보고 구매하였지만, 우연히 고른 이 책은 내 눈높이엔 좋은 책이었다..


 

두번째로 교회가 사회와 전혀 소통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초대교회떄는 과연 어떻게 사회와 소통했을까 라는 궁금점이 들어서 이 책을 구매하였다.


 

누군가는 그럴것이다. 그럼 초대교회때는 사회와 잘 소통하였냐. 나름 소통하였다 생각한다.


 

증거는 기독교 공인이라 생각한다. 로마는 300년간 기독교를 탄압하였다(물론 300년 내내 탄압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커뮤니티를 만들고, 자신들의 가르침을 삶에 적용하며 기독교를 공인할 수밖에 없게끔 사회적 여건을 만들어냈고, 콘스탄티누스는 이에 기독교 공인이란 결정을 하였다. 종교의 공인은 단순하게 높은 사람의 도장 하나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개신교는 어떤가, 감히 반 사회적인 가치를 지닌 종교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원래는 저번달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하려 하였다. 원래 목표는 톰 라이트의 하나님과 펜더믹이란 책과 이 책을 같이 엮어서 서평을 써보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지금도 엮질 못하고 있다. 거기다가 8월 15일엔 너무나 놀라운 일이 있어서 이 책을 서평할 생각을 못했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초대교회를 다시 바라보며, 과연 현재 교회는 초대교회에 비하여 사회와 어떤 거리감을 두고 있으며, 그 거리감을 어떻게 좁혀나가냐 에 대한 질문들을 조금이라도 형상화 시킬 수 있었다.


 


 

여러 이야기들을 한 듯하다.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보고자 한다.


 

먼저 서문을 보고나서 뒤편의 초대교회 연대표를 한번 보고 글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맨처음에 이 책을 읽고 책의 내용이 좀 방대하며, 초대교회란 것이 이렇게 방대한건가? 라는 생각을 했는데 뒤편의 연대표를 보고 확실히 알았다. 내가 아는 초대교회는 반쪽짜리도 안되는구나


 

시작을 북이스라엘의 멸망부터 하여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란 방대한 시간이 초대교회라는 것을 아예 생각조차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방대한대다가 초대교회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은 결국 신학을 하는 사람들 밖에 없으니 일반인을 위한 책이 드물 수 밖에 없단 것을 알았다.


 

서문의 문제의식 제기에 이어, 가톨릭 교회, 자유주의, 복음주의 총 네 가지의 교회론을 서술하였다.


 

보통의 역사책에선 당연히 시작이 몇 년도에 어땠으며 이때 이런일이 있었다 를 먼저 서술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저자는 교회론을 먼저 알아봐야 한다 하였다. 그리고 이는 서문에서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제 교회의 출발을 어디서부터 볼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주장을 살펴보자, 각자의 역사와 신학을 보는 관점에 따라 예수의 탄생을 교회의 출발로 보는 입장이 있고, 예수의 승천이 지상교회의 시작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제도 교회의 시작은 예수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고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언제 교회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다양한 시각 중에 어떤 견해를 수용할 것인지에 따라 초대교회를 이해하는 틀이 다르게 형성된다. 따라서 어떻게 교회를 보고 정의할 것이냐는 매우 중요하다(20p)'


 

그렇기에 저자는 앞에서 말한 네가지의 교회론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턴 보통의 역사책과 동일한 호흡과 흐름으로 초대교회사를 서술해나간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좀더 조명하고 싶은 챕터 2개만 자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6챕터는 동방교회에 대한 챕터이다.


 

먼저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서구의 시각에 의한 동방쪽의 역사전개 서술)을 벗어난 동방교회의 역사서술을 하고자 함을 설명한 뒤, 동방교회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했다.


 

그리곤 언어의 차이를 말하였다. 동방교회는 헬라어(고대 그리스어)를 채용하면서 서방교회와 성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얘기하였다.

(교회에서 중요하다 여겨지는 전례들로, 천주교는 칠성사를 얘기한다.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fid=1432&cat=&cid=174601&path=200701 를 참고 바란다)


 

동방교회에서의 성사를 뜻하는 단어는 미스터리온(mysterion)이었다. 이는 미스터리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이며, 미스터리란 단어에는 신비스러운 것이 존재하지만, 숨겨져 있어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서방교회가 주로 쓰이는 라틴어는 헬라어에 비해 젊다보니 철학적 용어인 미스터리온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었다, 그렇기에 번역할 때 사용한 단어가 세크라멘툼(sacramentum)이다. 이 단어는 법률적 테두리 속에서 신학을 이해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용어 중 하나이다. 이 단어는 secret과 같은 뿌리를 가진, 비밀이란 뜻을 가졌다. 비밀은 풀어나가는 것, 풀어야 의미가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성사를 대하는 태도가 단어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완전히 바뀌었다. 동방교회의 성사는 신비,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비해, 서방교회의 성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풀어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신학을 각자 다르게 발전해나갔다.


 

서방교회에서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삼위일체론에 사용되는 라틴어 개념들을 그리스도교에 접목한 사람이다. 서방 카톨릭 신학은 성부, 성자, 성령이 동등하게 상호 관계를 형상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구원에 있어서는 예수를 통해 성부와 올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을 구원이라 한다면


 

동방교회에서도 삼위일체는 서방교회와 같지만 구원에 있어서는 다르게 보았다. 동방교회에서 삼위일체의 신학을 정립한 아타나시우스는 예수가신으로서의 모든 권위와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온 것처럼, 인간도 예수를 본받아 예수처럼 살아가면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가서 신과 같이 될수 있다 주장하였으며, 오리게누스학파는 이 논리를 극단적으로 발전시켜, 신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는 관점을 보여줬으며 이를 신화(theosis)라 한다.


 

성사란 단어가 다르게 번역되면서, 기독교에서 제일 중요한 구원에 관한 논리도 바뀌었다.


 

또한 여러 신학의 주제들을 논리와 이성으로 명확히 드러내고자 하는 스콜라철학을 발전시킨 서구와 달리, 동방교회는 신비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수록 비진리화가 된다 봤다.(어떤 면에 있어선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철학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생각한다.)


 

위의 예시뿐만 아니라 저자는 동방교회가 신비를 대하는 여러 모습들을 책 속에 설명하였다.


 

이처럼 낯선 동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다루는 신비를 자세히 조명한 저자는 이런 말을 6챕터 후반부에 남겼다.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명제 속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또 열린 마음으로 낯설지만 더 오랜 뿌리라고할 수 있는 동방교회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어야 마땅할 것이다.(173p)'


 


 

9챕터는 국가와 교회의 전환점이란 챕터다


 

즉 기독교 공인의 역사와 국가와 종교에 대한 관계를 고민하는 챕터이다.


 

기독교 공인에 관한 저자의 설명을 짧게 요약해보고자 한다.

로마제국은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기에 모든 민족의 정신의 일치를 이뤄야 하는 고민에 놓였다. 그리하여 그리스 신화를 받아들인 로마는 지역들을 정복해가며, 그 지역의 신들을 흡수 통일해 갔다. 하지만 이런 로마의 정책에 문제되는 종교가 있었으니 기독교였다. 유대교는 민족적으로 정의되기에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유대주의와 결별한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임과 동시에 제국의 통치정책에 문제가 되는 종교기도 하였다. 다른 종교들은 자신들의 신을 믿으면서도 로마황제를 하나의 신으로 인정하고 숭배하기만 하면 제국의 통일성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었지만, 기독교는 이러한 암묵적 약속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렇기에 로마는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300년간 지속된다.


 

하지만 260년경 교회의 감독이 국가의 고위직으로 발탁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로마제국이 주기적으로 핍박하였지만 기독교는 세력을 확장해 나갔단 증거기도 하다. 272년 아우렐리아누스는 기독교 세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음을 알게 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였다


 

이 밀라노 칙령은 교회가 국가교회 체제로 넘어가게 되는 분수령으로 자리매김 하였으며, 국가교회 체제의 전통을 유아세례라고 저자는 말하였다.


 

'국가교회 체계하에서는 유아 세례가 이루어졌다. 여전히 오랜 전통으로 남아 있는데, 제국 교회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유대인도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유대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처럼, 교회와 국가가 일체화된 시스템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바로 세례를 받아 교회에 등록이 되고 동시에 국가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248p)'


 

이는 여러모로 교회내에서도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도나투스파와 재세례파에서는 이를 부정하였다. 하지만 중세교회는 국가교회 전통이 주류였고 이는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국익을 중요시 여긴 한기총을 언급하며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위정자는 신의 선택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국가 없이는 교회도 존재할 수 없다는 신화를 재고해야 한다고 얘기하며 이렇게 이 챕터를 마무리하였다


 

'313년 이래 내려온 이 신화를 이제는 재고해야 한다. 교회는 국가의 이해를 넘어선 인간 보편의 이익과 가치를 지향할 때만 진정한 존재 의미가 있다.(253p)'


 


 

앞에서 말한대로 두개의 챕터를 조명하였으므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초대교회란 단어는 참으로 어려운 단어이며, 또한 넓은 단어다. 수많은 전통들이 그 안에 있으면서 분열되고, 다시 커지면서 분열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와 교회의 관계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어쩜 우리 한국교회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국가에 대한 애국심 고취를 종교를 통해 한 부분들이 있기에


 

그렇기에 우린 계속 질문하고 탐구해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란 무엇인가 그리고 초대교회를 비춰볼 때 우리는 어느 지점에 있으며, 그 지점에서 과연 초대교회와 같거나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가


 


 


 


 

언제나 서평을 쓰는건 어렵다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건 좀더 어려웠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했을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좋은 책을 읽고 단순하게 서너줄로 표현하는 것도 뭔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좀 길게 썼다.


 

언제나 말하듯 이 책에는 내가 말한 것보다 훨씬 좋은 내용들이 가득하다. 여러분들도 한번 일독을 권한다.


 

읽는분들에게 언제나 평안함이 가득하길 바라는 바다.


 


 

참고한 링크- http://www.saeronam.or.kr/home/hpp_story4/738821


음과 말-푸르트벵글러 음악의 길라잡이



 


 

포노에서 출간한 음악의 길 시리즈 중 8번쨰 책이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작가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다. 푸르트벵글러란 이름이 저자로 있는데, 읽지 않으려 하기엔 너무나도 매혹적인 이름이어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푸르트벵글러다. 클래식을 즐겨듣는 사람들에게야 푸르트벵글러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이지만,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이름일수 있다. 푸르트벵글러에 관한 건 참고링크(http://asembley.egloos.com/639906)를 보길 바란다.


 

또한 이 책에선 그 시대 독일의 상황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에세이도 있다. 특히 1930년대는 모두 알다시피 나치 독일이 독일을 지배하던 시대다. 그 시대의 상황을 푸르트벵글러가 에세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흥미 있는 이유 중 하나다.


 

물론 이 책에는 나치 독일의 대두로 인한 시대적 배경만 나오지 않는다. 지금에 있어선 재즈는 거의 묻혔지만 그 시대에는 재즈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나 보여주는 표현들도 나오며, 녹음에 의해 위협받는 공연계등등 여러 시대적 배경이 글에 묻어있고, 이를 찾아보는 것도 글을 읽는데 또다른 즐거움이다.


 

본문으로 들어가보자


 

본문에서 중요시 여긴 것들이 있다. 저자가 독일인의 자산이라 부르기 마다 않는 베토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베토벤 이후 독일이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음악가인 브람스, 브람스와 동시대의 인물인 바그너다. 이 세 음악가에 대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였다.


 

또한 저자가 가장 자주 자휘한 오케스트라인 베를린필과 빈필에 대해 분량을 할애하였으며, 자신의 음악적 해석, 프로그램, 시대음악(고음악의 재현)에 대한 생각. 암보지휘, 음악회 프로그램에 대한 글처럼 지휘자로서 여러 생각들을 보여줄 수 있는 에세이들도 책에 넣었다.


 

나는 저자가 중요시한 음악가인 베토벤, 브람스에 대해 어떻게 서술하였는지 간단히 요약해 쓰고자 한다.


 

먼저 베토벤이다


 

이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음악가다. 그는 사람들이 베토벤에 대해 아주 크게 잘못 알고 있으며,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다루고 있다 말한다. 그는 베토벤을 이해할 때, 사람들이 베토벤의 작품들을 이해할 때 대부분 괴테가 이해한 것처럼, 작품에 인물상을 끼워 넣는 것을 굉장히 잘못됐다고 평가한다.


 

물론 외적인 삶이 무척 매력적이다. 하지만 베토벤은 오직 음으로서 이해해야 하며, 순수하게 음악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베토벤의 음은 유기적으로서 연주되어야 하기에, 해석자는 음악에 대한 따스한 몰입과, 명확성을 보여주겠다는 불굴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베토벤의 음악은 명확성과 엄격한 형식 구성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베토벤의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형식만 앞세워진 진부하며, 작품내의 생명력은 사라지며, 닳아 빠진 작품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베토벤의 음악이 현대적이고 시의성을 갖추었으며, 과거의 예술이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베토벤의 음악이 어째서 지금도 유효한지에 대해서 설명하였는데, 그의 음이 모짜르트처럼 선율이 두드러지지 않고, 바흐처럼 건축적이거나 경쾌하지 않으며, 바그너처럼 극적이고 감각적이지 않지만 이들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특성은 고유의 자리에 함께 어울려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어찌 보면 푸르트벵글러는 그의 음악안에서 절대성과 순수성을 같이 느낀 듯 하다.


 

그리고도 베토벤에 대해 설명할게 남았는지 베토벤의 가장 유명한 교향곡인 5번의 1악장을 해설하면서, 베토벤은 어째서 지금도 낡지 않은 채 고풍적으로 살아있으며, 현대적 감각에도 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와 함께 베토밴의 중요성을 5번 1악장을 통해, 어찌보면 앞에서 말한 것의 반복일수 있지만, 베토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베토벤은 또다른 믿음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든다.


 


 

베토벤을 살펴보았으니 브람스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가 보통 낭만주의 음악가라고 말하면 들어가는 작곡가중 한 명이 브람스다. 하지만 작가는 그를 독일 고전파의 마지막 음악가로 말한다. 어찌보면 베토벤과 슈베르트 바로 다음을 브람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닌 기존의 양식들에서 벗어난 음악을 만들지 못한 것에 일정부분 동의한다. 푸르트벵글러는 그를 고전주의 음악가로 인식하는 듯 하다.


 

그는 살아있을 당시에, 혹평 받는 작곡가중 하나였다. 그리고 평생 바그너에게 밀렸으며, 사후에는 브루크너와 슈트라우스와 같은 작곡가들에게 밀려서 2위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재 세계적으로 음악회에서 빠지지 않는 작곡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바그너도, 브루크너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작곡에 있어서도 여러 작곡가들과 그는 달랐다. 베토벤마저도 시대가 원하는, 순응하는 작품을 썼는데 반해, 브람스는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각을 내세우고 관철하며,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본질을 고민하는 작곡가였다.


 

푸르트벵글러는 브람스가 음악양식의 발전을 꾀하지 않은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새로운 분야란 없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의 예술발전은 확장이 아닌 내면의 집중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더욱 간결해지고, 조밀해지고 압축되었으며, 강력한 내용을 단순하고 간결한 형식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을 보였다고 말하였다.


 

이는 브람스가 슈트라우스의 교향곡 F단조 OP 12를 듣고 말한 조언을 보면 이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다.


 

'음악적 실마리를 계속 풀어 나가려고 주제와 하위 주제에 대위법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간단하게 여덟 마디짜리 악절을 쓰는 게 훨씬 생산적이고 유용하죠. 하지만 그게 더 어렵기도 합니다.'


 

브람스는 말년으로 갈수록 어떻게 보면 괴팍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신작인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실내악 작품을 외부에 선보이겟다는 욕심없이 혼자 형편없이 연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이런 그를 이렇게 표현한다.


 

브람스는 시대의 객체가 되어 시대 속에 빠져 있지 않고 거기에 맞서면서 위기를 겪어낸 최초의 음악가엿다. 여기에서 반동이란 말을 쓰는 건 잘못된 일이다. 그는 현대적 인간이었고 평생을 현대인으로 살았다.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사람을 우리는 철학가라 부르기도 한다. 푸르트벵글러는 그가 발전 없는 작곡가가 아닌, 자신만의 철학을 관철하며 작곡을 한 사람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라 생각이 든다.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글엔 책의 많은 부분이 빠져있다. 지휘자인 자신이 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독일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독일 작곡가들 안에 있는 민족성등등


 

책에는 굉장히 많은 부분이 할애되었지만 난 이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만 보여드렸다.


 

많은 부분들을 쓰지 못했지만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푸르트벵글러란 지휘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구매해야 하며, 지휘자란 어떤 것이며, 어떤 고민들을 하는가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구매해야 하고, 클래식 입문이 아닌 어느정도 클래식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구매해도 손해 없을 책이다. 정말 좋은 책이다. 꼭 구매하길 바란다.


 


 

길고도 난잡한 글을 읽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오늘도 평안한 하루, 내일도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라는 바이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